보헤미아 왕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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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왕관령은 중부 유럽에 위치했던 역사적 영토로,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 실레지아 공국, 루사티아 변경백국 등으로 구성되었다. 12세기부터 13세기에는 룩셈부르크 왕가가, 1526년 이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했다. 보헤미아 왕관령은 단순한 동군 연합이 아닌 보헤미아 왕국이 중심이 되는 구조였으며, 각 구성 영토는 고유한 행정 구역을 가졌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 체코 공화국의 역사적 지역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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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왕관령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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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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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체코어: Země Koruny české (제메 코루니 체스케) 독일어: Länder der Böhmischen Krone (렌더 데어 뵈미셴 크로네) 라틴어: Corona regni Bohemiae (코로나 레그니 보헤미아이) |
일반 명칭 | 보헤미아 왕관령 |
존속 기간 | 1348년 - 1918년 |
위치 | 현재의 체코, 독일, 폴란드 |
수도 | 프라하 |
공용어 | 체코어, 독일어, 라틴어 |
종교 | 공식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후스파 (이후 보헤미아 개혁교회 (양형주의, 형제단)) 기타: 루터교 (종교개혁 시기 다수), 유대교 (유대인), 칼뱅주의, 후터파 재세례파, 발도파, 신아담파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지위 | 1348년-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국가 1526년-1804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왕관령 1804년-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왕관령 1867년-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슬라이타니아 지역 |
수장 칭호 | 국왕 |
초대 국왕 | 카를 1세 |
마지막 국왕 | 카를 3세 |
역사 | |
설립 | 1348년 4월 7일 |
룩셈부르크 가문의 시작 | 1348년 4월 7일 |
보헤미아 왕관령의 주요 부분으로 편입 | 1355년 4월 5일 |
금인칙서로 국왕의 선제후 지위 확인 | 1356년 12월 25일 |
페르디난트 1세의 보헤미아 국왕 즉위 | 1526년 12월 16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 1918년 10월 31일 |
구성국 | |
구성국 |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 슐레지엔 공국 상 루사티아 하 루사티아 후스파의 통제를 받던 보헤미아 왕관령 지역 에게를란트 오버팔츠 (팔츠 선제후국) |
해체 이후 | |
해체 이후 |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작센 선제후국 프로이센 자유주 폴란드 제2공화국 |
2. 역사
## 중세
12세기부터 13세기에 보헤미아 왕국과 연결되어 있던 봉토는 모라바 변경백국과 클라츠코 백작령/Grafschaft Glatzde 뿐이었다. 룩셈부르크 왕가의 보헤미아 왕 요한과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의 치세에, 적극적인 병합 정책으로 인해 슐레지엔, 오버라우지츠 및 니더라우지츠에서 다수의 소규모 봉토가 보헤미아 왕관령에 추가되었다.
카를 4세는 왕국의 여러 신분에게 룩셈부르크 왕가가 단절된 경우에도 왕가의 흥망과는 관계없이 왕관령의 결합을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왕관령의 결합은 1526년에 페르디난트 1세의 즉위와 함께 보헤미아 왕위가 합스부르크 왕가로 상속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보헤미아 왕관령은 헝가리 왕관령 및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함께 중부 유럽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3대 영토 중 하나를 구성했다.
보헤미아 왕관령은 단순한 동군 연합도, 각 구성체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연방도 아니었다. 왕관령의 국체는 인체에 비유하자면 보헤미아 왕국과 왕국의 여러 신분이 '머리'였고, 그 외의 여러 봉토가 '손발'이라는 서열이었다. 보헤미아 왕관령에서 '머리'와 '손발'의 지위 차이는 컸으며, 왕국의 여러 신분, 즉 보헤미아인은 왕관령 내의 정치적·사회적 주도권을 독점할 권리를 요구했고, 이에 대해 모라바, 슐레지엔, 라우지츠 측은 자유 의지에 의해 보헤미아 왕관에 속해 있다는 국체상의 원칙을 내세워 자신들의 자치권을 주장했다.
보헤미아 왕국의 인접 봉토에 대한 우월에는 애초에 법적 근거조차 없었지만, 15세기 초에는 더 강력한 권한을 요구하며 국왕 선거에서의 독점적 선거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1620년 이후에는 보헤미아 왕관령 자체가 훨씬 더 큰 권한을 가진 합스부르크 제국에 압도당했기 때문에, 왕관령 내 각 구성체 간의 경쟁은 사라졌다.
## 프르셰미슬 왕조
10세기와 11세기, 보헤미아 공작령은 모라바 (1182년부터 모라바 변경백국) 및 클로즈코 영토와 함께 프르셰미슬 왕조의 통치하에 통합되었다.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1세 공작은 1198년, 지지를 대가로 독일 (반)왕 슈바벤의 필리프로부터 보헤미아 공작령에 대한 세습 왕위를 얻었다. 필리프는 왕위와 함께 공작령의 지위를 보헤미아 왕국으로 격상시켰다. 이 왕위는 결국 필리프의 조카인 독일 왕 프리드리히 2세, 후에는 신성 로마 황제 (1220-1250)에 의해 1212년 발행된 시칠리아 금인칙서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프르셰미슬 왕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는 1251년 오스트리아 공작령, 1261년 슈타이어마르크 공작령, 1266년 에거란트, 1269년 케른텐 공작령과 카르니올라 변경백국 및 빈디셰 변경백국, 1272년 프리울리 변경백국을 획득했다. 보헤미아를 주요 제국 국가로 만들려는 그의 계획은 그의 합스부르크 라이벌인 독일 왕 루돌프 1세에 의해 좌절되었고, 루돌프 1세는 그가 획득한 영토를 빼앗았으며, 결국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2]
## 룩셈부르크 왕조
1306년, 룩셈부르크 가문은 프르제미슬 왕조가 단절된 후 보헤미아 왕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헤미아 영토를 다시 크게 확장했는데, 그중 하나는 요한 1세 왕이 폴란드 피아스트 공작 대부분을 실레지아의 봉신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의 종주권은 1335년 트렌친 조약에서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3세에 의해 인정받았다. 요한은 또한 독일 왕 루트비히 4세로부터 바우첸 (1319년)과 괴를리츠 (1329년)의 상부 루사티아 영지를 봉토로 받았다.
요한 왕의 맏아들 카를 4세는 1346년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보헤미아 왕의 자리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1348년,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이 세습적으로 통치하는 전체 국가를 지칭하는 용어인 ''보헤미아 왕관''(''Corona regni Bohemiae'' in 코로나 레그니 보헤미아이/Corona regni Bohemiaela)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보헤미아의 핵심 영토뿐만 아니라 편입된 속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6]
룩셈부르크 왕조는 카를이 1355년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2] 그는 황제의 권위로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되더라도 통합된 보헤미아 영토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7]
1367년, 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인 의붓아들 오토 5세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으로부터 하부 루사티아를 매입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그들의 고향인 룩셈부르크 백국 외에도 저지대 국가에 여러 개의 인접하지 않은 제국 봉토를 소유했는데, 예를 들어 카를의 이복 동생 벤체슬라우스가 1355년 결혼을 통해 얻은 브라반트 공국과 림부르크 공국; 1373년에 매입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등이 있었다. 보헤미아 왕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모두 1356년 금인칙서에서 선제후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룩셈부르크 가문은 선거인단에서 두 표를 행사하여 1376년 카를의 아들 벤체슬라우스의 계승을 보장했다.
벤체슬라우스 왕 시대에 룩셈부르크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1400년 로마 왕에서 폐위되었다. 브라반트 공국, 림부르크 공국(1406년), 심지어 룩셈부르크 자체(1411년)도 프랑스의 발루아-부르고뉴 왕가에 양도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호엔촐레른 가문으로 넘어갔다 (1415년).[7]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 영토의 공동 통치는 후스 전쟁과 1437년 황제 지기스문트의 죽음으로 룩셈부르크 남계가 단절된 후에도 존속했다.
## 야기에우워 왕조
블라디슬라오 2세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이자 야гел로 왕조 출신으로, 1471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지명되었다. 당시 모라바 왕국, 슐레지엔 공국, 루사티아 왕관령은 헝가리의 경쟁 왕 마차시 코르비누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1479년 두 왕은 올로모우츠 조약을 체결하여 보헤미아 왕관령의 통일성을 공식적으로 유지하고 서로를 유일한 상속자로 임명했다.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하자 블라디슬라오 2세는 보헤미아 왕관령과 헝가리 왕국을 개인 연합으로 통치했다.
## 합스부르크 왕조
러요스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의 통치가 끝나자, 보헤미아 귀족들의 협의회는 그의 매형인 합스부르크 대공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왕관령의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세습 영지" 및 헝가리 왕국과 함께 이들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형성했으며,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에서 분리되어 유럽의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했다.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영지들이 자치 연방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1620년 백산 전투에서 좌절되었고, 이후 행정부는 빈에 집중되었다. 또한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은 1635년 프라하 평화 조약 이후 작센 선제후국에게 루사티아를, 1742년 브레슬라우 조약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게 클라츠코와 함께 대부분의 슐레지엔을 잃었다.[2]
1599년부터 1711년까지, 현대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의 국경은 오스만 제국과 그 봉신들(특히 타타르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의해 자주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수십만 명이 노예로 잡혔고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8]
## 근대
보헤미아 왕관령의 모든 구성체가 공유하는 국가 기관은 국왕뿐이었지만, 위기의 시대에는 이것이 왕관령의 단점이 되었다. 왕관령의 여러 봉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이는 왕관령 의회(Generallandtag)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대법관(Oberstkanzlers)의 통솔하에 놓이는 궁내 관방(Böhmische Hofkanzlei)만이 왕관령의 전 영토에 대해 책임을 가졌다. 그러나 궁내 관방도 1620년에 프라하에서 빈으로 이전되었고, 1714년에는 관방용 청사가 건설되었다.
공통의 정치 기관을 거의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 왕관령의 여러 봉 사이에는 16세기부터 더 강한 정치적 연대감이 나타났다. 30년 전쟁이 시작되자 왕관령의 여러 봉은 보헤미아 연맹(Böhmische Konföderation)을 결성했지만, 이 연맹의 결성은 보헤미아의 정치 체제 근대화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황제군이 승리하면서 이 실험적인 국가도 소멸되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보헤미아 왕관령은 오스트리아 내 구성 지역으로서의 중요성을 잃어갔다. 1635년에는 프라하 조약에 의해 라우지츠를 작센 선제후국에 빼앗겼다. 1742년의 베를린 조약에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슐레지엔의 대부분과 그라츠 백작령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 할양했다. 오스트리아 쪽에 남은 슐레지엔의 일부는 상하 슐레지엔 공작령(Herzogtum Ober- und Niederschlesien, 현재의 체코령 슐레지엔)으로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판도에 머물렀다.
##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현대에는 보헤미아, 모라비아,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의 남은 왕관령이 1804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 부분이 되었고, 이후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치슬라이타니아가 되었다.
##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1918년 10월과 11월에 치슬라이타니아, 더 정확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1916년 체코인 망명 정치인과 삼국 협상 간의 협정에 따라 체코는 보헤미아 왕관령의 역사적 경계를 넘어 신생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 지역을 구성하게 되었다.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c of German-Austria영어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근거로 보헤미아-모라비아의 독일계 주민 지역(독일 보헤미아와 독일 모라비아) 및 실레지아의 오스트리아계 주민 지역이 체코 영토 내에 잔류하고 있음을 주장했지만, 어떤 정치적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보헤미아 왕관령이 존재했던 역사적 영향은 발티체 (펠츠베르크)를 둘러싼 오스트리아와의 분쟁 문제나 자올지에를 둘러싼 폴란드와의 분쟁 문제 등, 후계 국가인 현재의 체코에도 다양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2. 1. 중세
12세기부터 13세기에 보헤미아 왕국과 연결되어 있던 봉토는 모라바 변경백국과 뿐이었다. 룩셈부르크 왕가의 보헤미아 왕 요한과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의 치세에, 적극적인 병합 정책으로 인해 슐레지엔, 오버라우지츠 및 니더라우지츠에서 다수의 소규모 봉토가 보헤미아 왕관령에 추가되었다.카를 4세는 왕국의 여러 신분에게 룩셈부르크 왕가가 단절된 경우에도 왕가의 흥망과는 관계없이 왕관령의 결합을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왕관령의 결합은 1526년에 페르디난트 1세의 즉위와 함께 보헤미아 왕위가 합스부르크 왕가로 상속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보헤미아 왕관령은 헝가리 왕관령 및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함께 중부 유럽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3대 영토 중 하나를 구성했다.
보헤미아 왕관령은 단순한 동군 연합도, 각 구성체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연방도 아니었다. 왕관령의 국체는 인체에 비유하자면 보헤미아 왕국과 왕국의 여러 신분이 '머리'였고, 그 외의 여러 봉토가 '손발'이라는 서열이었다. 보헤미아 왕관령에서 '머리'와 '손발'의 지위 차이는 컸으며, 왕국의 여러 신분, 즉 보헤미아인은 왕관령 내의 정치적·사회적 주도권을 독점할 권리를 요구했고, 이에 대해 모라바, 슐레지엔, 라우지츠 측은 자유 의지에 의해 보헤미아 왕관에 속해 있다는 국체상의 원칙을 내세워 자신들의 자치권을 주장했다.
보헤미아 왕국의 인접 봉토에 대한 우월에는 애초에 법적 근거조차 없었지만, 15세기 초에는 더 강력한 권한을 요구하며 국왕 선거에서의 독점적 선거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1620년 이후에는 보헤미아 왕관령 자체가 훨씬 더 큰 권한을 가진 합스부르크 제국에 압도당했기 때문에, 왕관령 내 각 구성체 간의 경쟁은 사라졌다.
보헤미아 왕관령의 모든 구성체가 공유하는 국가 기관은 국왕뿐이었지만, 위기의 시대에는 이것이 왕관령의 단점이 되었다. 왕관령의 여러 봉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이는 왕관령 의회(Generallandtag)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대법관(Oberstkanzlers)의 통솔하에 놓이는 궁내 관방(Böhmische Hofkanzlei)만이 왕관령의 전 영토에 대해 책임을 가졌다. 그러나 궁내 관방도 1620년에 프라하에서 빈으로 이전되었고, 1714년에는 관방용 청사가 건설되었다.
공통의 정치 기관을 거의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 왕관령의 여러 봉 사이에는 16세기부터 더 강한 정치적 연대감이 나타났다. 30년 전쟁이 시작되자 왕관령의 여러 봉은 보헤미아 연맹(Böhmische Konföderation)을 결성했지만, 이 연맹의 결성은 보헤미아의 정치 체제 근대화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황제군이 승리하면서 이 실험적인 국가도 소멸되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보헤미아 왕관령은 오스트리아 내 구성 지역으로서의 중요성을 잃어갔다. 1635년에는 프라하 조약에 의해 라우지츠를 작센 선제후국에 빼앗겼다. 1742년의 베를린 조약에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슐레지엔의 대부분과 그라츠 백작령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 할양했다. 오스트리아 쪽에 남은 슐레지엔의 일부는 상하 슐레지엔 공작령(Herzogtum Ober- und Niederschlesien, 현재의 체코령 슐레지엔)으로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판도에 머물렀다. 합스부르크 제국 말기, 치슬라이타니아의 구성 지역으로 전락한 보헤미아, 모라바와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 등 보헤미아 왕관령 여러 봉이 독자적인 권한을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2. 1. 1. 프르셰미슬 왕조
10세기와 11세기, 보헤미아 공작령은 모라바 (1182년부터 모라바 변경백국) 및 클로즈코 영토와 함께 프르셰미슬 왕조의 통치하에 통합되었다.보헤미아의 오타카르 1세 공작은 1198년, 지지를 대가로 독일 (반)왕 슈바벤의 필리프로부터 보헤미아 공작령에 대한 세습 왕위를 얻었다. 필리프는 왕위와 함께 공작령의 지위를 보헤미아 왕국으로 격상시켰다. 이 왕위는 결국 필리프의 조카인 독일 왕 프리드리히 2세, 후에는 신성 로마 황제 (1220-1250)에 의해 1212년 발행된 시칠리아 금인칙서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프르셰미슬 왕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는 1251년 오스트리아 공작령, 1261년 슈타이어마르크 공작령, 1266년 에거란트, 1269년 케른텐 공작령과 카르니올라 변경백국 및 빈디셰 변경백국, 1272년 프리울리 변경백국을 획득했다. 보헤미아를 주요 제국 국가로 만들려는 그의 계획은 그의 합스부르크 라이벌인 독일 왕 루돌프 1세에 의해 좌절되었고, 루돌프 1세는 그가 획득한 영토를 빼앗았으며, 결국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2]
2. 1. 2. 룩셈부르크 왕조
1306년, 룩셈부르크 가문은 프르제미슬 왕조가 단절된 후 보헤미아 왕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헤미아 영토를 다시 크게 확장했는데, 그중 하나는 요한 1세 왕이 폴란드 피아스트 공작 대부분을 실레지아의 봉신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의 종주권은 1335년 트렌친 조약에서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3세에 의해 인정받았다. 요한은 또한 독일 왕 루트비히 4세로부터 바우첸 (1319년)과 괴를리츠 (1329년)의 상부 루사티아 영지를 봉토로 받았다.요한 왕의 맏아들 카를 4세는 1346년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보헤미아 왕의 자리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1348년,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이 세습적으로 통치하는 전체 국가를 지칭하는 용어인 ''보헤미아 왕관''(''Corona regni Bohemiae'' in 코로나 레그니 보헤미아이/Corona regni Bohemiaela)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보헤미아의 핵심 영토뿐만 아니라 편입된 속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6]
룩셈부르크 왕조는 카를이 1355년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2] 그는 황제의 권위로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되더라도 통합된 보헤미아 영토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7]
1367년, 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인 의붓아들 오토 5세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으로부터 하부 루사티아를 매입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그들의 고향인 룩셈부르크 백국 외에도 저지대 국가에 여러 개의 인접하지 않은 제국 봉토를 소유했는데, 예를 들어 카를의 이복 동생 벤체슬라우스가 1355년 결혼을 통해 얻은 브라반트 공국과 림부르크 공국; 1373년에 매입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등이 있었다. 보헤미아 왕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모두 1356년 금인칙서에서 선제후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룩셈부르크 가문은 선거인단에서 두 표를 행사하여 1376년 카를의 아들 벤체슬라우스의 계승을 보장했다.
벤체슬라우스 왕 시대에 룩셈부르크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1400년 로마 왕에서 폐위되었다. 브라반트 공국, 림부르크 공국(1406년), 심지어 룩셈부르크 자체(1411년)도 프랑스의 발루아-부르고뉴 왕가에 양도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호엔촐레른 가문으로 넘어갔다 (1415년).[7]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 영토의 공동 통치는 후스 전쟁과 1437년 황제 지기스문트의 죽음으로 룩셈부르크 남계가 단절된 후에도 존속했다.
2. 2. 근세
12세기부터 13세기에 보헤미아 왕국과 연결되어 있던 봉토는 모라바 변경백국과 클라츠코 백작령/Grafschaft Glatzde 뿐이었다. 룩셈부르크 왕가의 보헤미아 왕 요한과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의 치세에, 적극적인 병합 정책으로 인해 슐레지엔, 오버라우지츠 및 니더라우지츠에서 다수의 소규모 봉토가 보헤미아 왕관령에 추가되었다.카를 4세는 왕국의 여러 신분에게 룩셈부르크 왕가가 단절된 경우에도 왕가의 흥망과는 관계없이 왕관령의 결합을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왕관령의 결합은 1526년에 페르디난트 1세의 즉위와 함께 보헤미아 왕위가 합스부르크 왕가로 상속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보헤미아 왕관령은 헝가리 왕관령 및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함께 중부 유럽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3대 영토 중 하나를 구성했다.
보헤미아 왕관령은 단순한 동군 연합도, 각 구성체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연방도 아니었다. 왕관령의 국체는 인체에 비유하자면 보헤미아 왕국과 왕국의 여러 신분이 '머리'였고, 그 외의 여러 봉토가 '손발'이라는 서열이었다. 보헤미아 왕관령에서 '머리'와 '손발'의 지위 차이는 컸으며, 왕국의 여러 신분, 즉 보헤미아인은 왕관령 내의 정치적·사회적 주도권을 독점할 권리를 요구했고, 이에 대해 모라바, 슐레지엔, 라우지츠 측은 자유 의지에 의해 보헤미아 왕관에 속해 있다는 국체상의 원칙을 내세워 자신들의 자치권을 주장했다.
보헤미아 왕국의 인접 봉토에 대한 우월에는 애초에 법적 근거조차 없었지만, 15세기 초에는 더 강력한 권한을 요구하며 국왕 선거에서의 독점적 선거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1620년 이후에는 보헤미아 왕관령 자체가 훨씬 더 큰 권한을 가진 합스부르크 제국에 압도당했기 때문에, 왕관령 내 각 구성체 간의 경쟁은 사라졌다.
보헤미아 왕관령의 모든 구성체가 공유하는 국가 기관은 국왕뿐이었지만, 위기의 시대에는 이것이 왕관령의 단점이 되었다. 왕관령의 여러 봉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이는 왕관령 의회(Generallandtag)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대법관(Oberstkanzlers)의 통솔하에 놓이는 궁내 관방(Böhmische Hofkanzlei)만이 왕관령의 전 영토에 대해 책임을 가졌다. 그러나 궁내 관방도 1620년에 프라하에서 빈으로 이전되었고, 1714년에는 관방용 청사가 건설되었다.
공통의 정치 기관을 거의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 왕관령의 여러 봉 사이에는 16세기부터 더 강한 정치적 연대감이 나타났다. 30년 전쟁이 시작되자 왕관령의 여러 봉은 보헤미아 연맹(Böhmische Konföderation)을 결성했지만, 이 연맹의 결성은 보헤미아의 정치 체제 근대화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황제군이 승리하면서 이 실험적인 국가도 소멸되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보헤미아 왕관령은 오스트리아 내 구성 지역으로서의 중요성을 잃어갔다. 1635년에는 프라하 조약에 의해 라우지츠를 작센 선제후국에 빼앗겼다. 1742년의 베를린 조약에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슐레지엔의 대부분과 그라츠 백작령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 할양했다. 오스트리아 쪽에 남은 슐레지엔의 일부는 상하 슐레지엔 공작령(Herzogtum Ober- und Niederschlesien, 현재의 체코령 슐레지엔)으로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판도에 머물렀다. 합스부르크 제국 말기, 치슬라이타니아의 구성 지역으로 전락한 보헤미아, 모라바와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 등 보헤미아 왕관령 여러 봉이 독자적인 권한을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2. 2. 1. 야기에우워 왕조
블라디슬라오 2세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이자 야гел로 왕조 출신으로, 1471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지명되었다. 당시 모라바 왕국, 슐레지엔 공국, 루사티아 왕관령은 헝가리의 경쟁 왕 마차시 코르비누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1479년 두 왕은 올로모우츠 조약을 체결하여 보헤미아 왕관령의 통일성을 공식적으로 유지하고 서로를 유일한 상속자로 임명했다.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하자 블라디슬라오 2세는 보헤미아 왕관령과 헝가리 왕국을 개인 연합으로 통치했다.2. 2. 2. 합스부르크 왕조
러요스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의 통치가 끝나자, 보헤미아 귀족들의 협의회는 그의 매형인 합스부르크 대공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왕관령의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세습 영지" 및 헝가리 왕국과 함께 이들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형성했으며,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에서 분리되어 유럽의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했다.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영지들이 자치 연방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1620년 백산 전투에서 좌절되었고, 이후 행정부는 빈에 집중되었다. 또한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은 1635년 프라하 평화 조약 이후 작센 선제후국에게 루사티아를, 1742년 브레슬라우 조약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게 클라츠코와 함께 대부분의 슐레지엔을 잃었다.[2]
1599년부터 1711년까지, 현대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의 국경은 오스만 제국과 그 봉신들(특히 타타르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의해 자주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수십만 명이 노예로 잡혔고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8]
현대에는 보헤미아, 모라비아,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의 남은 왕관령이 1804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 부분이 되었고, 이후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치슬라이타니아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의 해체 이후, 이들은 일반적으로 체코 땅으로 불리며 체코 공화국을 형성하는 역사적 지역이 되었다. 훌친 지역이 있는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은 오늘날 체코령 슐레지엔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0년 제2 폴란드 공화국으로 넘어간 동부 체신 슐레지엔은 예외이다.[7]
2. 3. 근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스가 사망하면서 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의 통치가 끝나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그의 매형인 합스부르크 대공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왕관령의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세습 영지" 및 헝가리 왕국과 함께 이들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형성했으며,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에서 분리되어 유럽의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했다.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영지들이 자치 연방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1620년 백산 전투에서 좌절되었고, 이후 행정부는 빈에 집중되었다. 또한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은 1635년 프라하 평화 조약 이후 작센 선제후국에게 루사티아를, 1742년 브레슬라우 조약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게 클라츠코와 함께 대부분의 슐레지엔을 잃었다.[2]
1599년부터 1711년까지, 현대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의 국경은 오스만 제국과 그 봉신들(특히 타타르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의해 자주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수십만 명이 노예로 잡혔고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8]
현대에 보헤미아, 모라비아,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의 남은 왕관령은 1804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 부분이 되었고, 이후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치슬라이타니아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의 해체 이후, 이들은 일반적으로 체코 땅으로 불리며 체코 공화국을 형성하는 역사적 지역이 되었다. 훌친 지역이 있는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은 오늘날 체코령 슐레지엔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0년 제2 폴란드 공화국으로 넘어간 동부 체신 슐레지엔은 예외이다.[7]
2. 3. 1.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요스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의 통치가 끝나자, 보헤미아 귀족들의 협의회는 그의 매형인 합스부르크 대공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왕관령의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세습 영지" 및 헝가리 왕국과 함께 이들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형성했으며,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에서 분리되어 유럽의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했다.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영지들이 자치 연방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1620년 백산 전투에서 좌절되었고, 이후 행정부는 빈에 집중되었다. 또한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은 1635년 프라하 평화 조약 이후 작센 선제후국에게 루사티아를, 1742년 브레슬라우 조약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게 클라츠코와 함께 대부분의 슐레지엔을 잃었다.[2]
1599년부터 1711년까지, 현대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의 국경은 오스만 제국과 그 봉신들(특히 타타르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의해 자주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수십만 명이 노예로 잡혔고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8]
현대에는 보헤미아, 모라비아,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의 남은 왕관령이 1804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 부분이 되었고, 이후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치슬라이타니아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의 해체 이후, 이들은 일반적으로 체코 땅으로 불리며 체코 공화국을 형성하는 역사적 지역이 되었다. 훌친 지역이 있는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은 오늘날 체코령 슐레지엔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0년 제2 폴란드 공화국으로 넘어간 동부 체신 슐레지엔은 예외이다.[7]
2. 3. 2.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1918년 10월과 11월에 치슬라이타니아, 더 정확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1916년 체코인 망명 정치인과 삼국 협상 간의 협정에 따라 체코는 보헤미아 왕관령의 역사적 경계를 넘어 신생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 지역을 구성하게 되었다.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c of German-Austria영어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근거로 보헤미아-모라비아의 독일계 주민 지역(독일 보헤미아와 독일 모라비아) 및 실레지아의 오스트리아계 주민 지역이 체코 영토 내에 잔류하고 있음을 주장했지만, 어떤 정치적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보헤미아 왕관령이 존재했던 역사적 영향은 발티체 (펠츠베르크)를 둘러싼 오스트리아와의 분쟁 문제나 자올지에를 둘러싼 폴란드와의 분쟁 문제 등, 후계 국가인 현재의 체코에도 다양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3. 구성 영토
영방 | 수도 | 민족 | 종교 | 비고 | 문장 |
---|---|---|---|---|---|
보헤미아 왕국 | 프라하 | 체코인, 독일인 | 로마 가톨릭, 후스파, 재세례파(15~16세기), 루터교 | 895년에 프르셰미슬가 통치 하의 공작령이 되었고, 1085년에 왕국으로 승격, 14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령이 되었으며, 1526년에 합스부르크 가문 세습령의 구성 지역에 편입되었다. 1918년에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와 함께 소멸 | |
모라비아 변경백령 | 브르노 | 체코인, 독일인 | 로마 가톨릭, 후스파 및 재세례파(15~16세기), 루터교 | 907년까지 모라비아 왕국이 존재, 1031년부터 보헤미아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 |
오버라우지츠 변경백령 | 바우첸 | 독일인, 소르브인 | 루터교, 로마 가톨릭 | 12세기에 부디신(Budissin) 지방으로 보헤미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1329년에 정식으로 지배 하에 놓였고, 15세기에 상 루사티아(오버라우지츠)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1635년에 작센 선제후령에 병합되었다. | |
실레지아 공작령 | 브로츠와프, 1740년 이후는 오파바 | 독일인, 폴란드인 | 로마 가톨릭, 루터교 | 1138년에 폴란드의 공작령으로 성립, 1249년에 소규모 공작령의 집합체로 분열, 1348년까지 보헤미아의 종주권 하에 들어갔지만, 대부분이 1742년/1763년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 병합되었고, 잔부는 오스트리아령 실레지아를 구성했다. | |
클라츠 백작령 | 클라츠 | 독일인, 체코인 | 로마 가톨릭, 루터교 | 1137년의 클라츠 조약에 의해 클라츠 지방(Glatzer Distrikt)으로 보헤미아의 영향을 받았고, 1348년에 카를 4세에 의해 보헤미아 왕관 직속의 영방으로 격상되었다. 1459년에 백작령으로 승격되었지만, 보헤미아 왕관령 의회에 자체 대표를 보낼 권한을 갖지 못했다. 1742년/1763년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 | |
하라우지츠 변경백령 | 뤼벤 | 독일인, 소르브인 | 루터교 | 10세기에 라우지츠 변경백령이 되었고, 1367년에 보헤미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1635년에 작센 선제후령에 병합되었다. |
==== 핵심 영토 ====
보헤미아 왕관령의 핵심 영토는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실레시아 등으로 구성되었다. 보헤미아는 1085년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처음 왕실의 존엄이 수여되었으며, 오타카르 1세 치하에서 1198년부터 세습되었다. 1356년 금인칙서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로 확정되었다. 에거란트(''체브스코'')는 1291–1305년 사이에 바츨라프 2세가 획득하여 1322년 루이 4세에 의해 보헤미아에 담보로 제공되어 이후 보헤미아와 개인적 연합으로 통치되었다. 클라츠코 백국은 1459년에 설립되어 1742년 프로이센 왕국의 왕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모라바는 955년 레히펠트 전투 이후 프르제미슬 왕조(Přemyslid dynasty)와 슬라브니크 왕조(Slavník dynasty) 보헤미아 통치자들이 획득한 올로모우츠, 브르노, 즈노이모 공국은 999년 피아스트 왕조 치하의 폴란드에 상실되었고 1035년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1182년 프르제미슬 공작에 의해 변경백령으로 승격되었고, 1197년부터 보헤미아의 봉토가 되었다.
실레시아는 보헤미아 국왕 존과 폴란드 국왕 카지미르 3세 사이의 1335년 트렌친 조약에 의해 획득된 다양한 공국들로 이루어졌다. 합스부르크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브레슬라우 조약에 의해 1742년 프로이센 왕국의 왕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실레시아를 상실했으며, 그 남동부 지역은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후에 체코령 실레시아)로 불렸다.
상부 루사티아는 전 마이센 변경백령의 밀체니 영토로, 1319년(바우첸)과 1329년(괴를리츠) 보헤미아 국왕 존에 의해 최종적으로 통합되었다. 하부 루사티아는 전 루사티아 변경백령으로, 1367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에 의해 획득되었다.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1635년 프라하 평화 조약으로 루사티아를 작센 선제후국에 상실했다. 루사티아는 1815년까지 형식적으로 보헤미아 왕관령의 일부였으며, 오늘날 독일과 폴란드로 분할되어 있다.
괴를리츠 (즈고젤레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셋째 아들 괴를리츠의 요한을 위해 창설한 공국이다. 그는 137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괴를리츠(즈고젤레츠)의 유일한 공작이었다.
==== 기타 영토 ====
- 1373년 카를 4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변경백 오토 5세로부터 획득했다. 카를의 아들인 지기스문트는 1415년 브란덴부르크를 프리드리히 1세에게 하사했다.
- 1355년 카를 4세가 합병한 오버팔츠("보헤미아 팔츠")의 인접한 북부 지역인 슐츠바흐. 카를의 아들인 벤체슬라우스는 1401년 독일의 루페르트 왕 치하의 선제후 팔라티네이트에 이 지역을 잃었다.
- 에거란트
3. 1. 핵심 영토
보헤미아 왕관령의 핵심 영토는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실레시아 등으로 구성되었다. 보헤미아는 1085년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처음 왕실의 존엄이 수여되었으며, 오타카르 1세 치하에서 1198년부터 세습되었다. 1356년 금인칙서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로 확정되었다. 에거란트(''체브스코'')는 1291–1305년 사이에 바츨라프 2세가 획득하여 1322년 루이 4세에 의해 보헤미아에 담보로 제공되어 이후 보헤미아와 개인적 연합으로 통치되었다. 클라츠코 백국은 1459년에 설립되어 1742년 프로이센 왕국의 왕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정복되었다.모라바는 955년 레히펠트 전투 이후 프르제미슬 왕조(Přemyslid dynasty)와 슬라브니크 왕조(Slavník dynasty) 보헤미아 통치자들이 획득한 올로모우츠, 브르노, 즈노이모 공국은 999년 피아스트 왕조 치하의 폴란드에 상실되었고 1035년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1182년 프르제미슬 공작에 의해 변경백령으로 승격되었고, 1197년부터 보헤미아의 봉토가 되었다.
실레시아는 보헤미아 국왕 존과 폴란드 국왕 카지미르 3세 사이의 1335년 트렌친 조약에 의해 획득된 다양한 공국들로 이루어졌다. 합스부르크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브레슬라우 조약에 의해 1742년 프로이센 왕국의 왕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실레시아를 상실했으며, 그 남동부 지역은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후에 체코령 실레시아)로 불렸다.
상부 루사티아는 전 마이센 변경백령의 밀체니 영토로, 1319년(바우첸)과 1329년(괴를리츠) 보헤미아 국왕 존에 의해 최종적으로 통합되었다. 하부 루사티아는 전 루사티아 변경백령으로, 1367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에 의해 획득되었다.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1635년 프라하 평화 조약으로 루사티아를 작센 선제후국에 상실했다. 루사티아는 1815년까지 형식적으로 보헤미아 왕관령의 일부였으며, 오늘날 독일과 폴란드로 분할되어 있다.
괴를리츠 (즈고젤레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셋째 아들 괴를리츠의 요한을 위해 창설한 공국이다. 그는 137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괴를리츠(즈고젤레츠)의 유일한 공작이었다.
3. 2. 기타 영토
- 1373년 카를 4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변경백 오토 5세로부터 획득했다. 카를의 아들인 지기스문트는 1415년 브란덴부르크를 프리드리히 1세에게 하사했다.
- 1355년 카를 4세가 합병한 오버팔츠("보헤미아 팔츠")의 인접한 북부 지역인 슐츠바흐. 카를의 아들인 벤체슬라우스는 1401년 독일의 루페르트 왕 치하의 선제후 팔라티네이트에 이 지역을 잃었다.
- 에거란트
4. 정치 및 행정
보헤미아 왕관령은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 실레시아 공국, 루사티아 변경백국으로 구성되었다. 각 지역은 고유한 행정 구역(Kraj)으로 나뉘었다.
4. 1. 보헤미아 왕관령의 구조
4. 2. 보헤미아 왕관령 의회
4. 3. 행정 구역
보헤미아 왕관령은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 실레시아 공국, 루사티아 변경백국으로 구성되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Kraj는 베히네, 볼레슬라프, 차슬라프, 흐루딤, 흐라데츠크랄로베, 클라츠코, 코르짐, 리토메르지체, 로켓, 블타바, 플젠, 포드브르드스코, 프라헨, 라코브니크, 슬라니, 자테츠로 나뉘었다.
모라바 변경백국의 Kraj는 브르노, 흐라디슈테, 이흘라바, 올로모우츠, 프르셰로프, 즈노이모로 나뉘었다.
실레시아 공국은 브제크, 비톰, 체신, 그워구프, 야보르, 레그니차, 니사, 올레시니차, 오파바, 오폴레, 프슈치나, 라치부르, 시나바, 시비드니차, 브로츠와프, 자가니, 지에비체로 나뉘었다.
루사티아 변경백국은 상부 루사티아와 하부 루사티아로 나뉘었다.
5. 사회와 문화
5. 1. 민족 구성
5. 2. 종교
6. 영향
1916년 체코인 망명 정치인과 삼국 협상 간의 협정에 따라 체코는 보헤미아 왕관령의 역사적 경계를 넘어 신생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 지역을 구성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근거로 보헤미아-모라비아의 독일계 주민 지역(독일 보헤미아와 독일 모라비아) 및 실레지아의 오스트리아계 주민 지역이 체코 영토 내에 잔류하고 있음을 주장했지만, 어떤 정치적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보헤미아 왕관령이 존재했던 역사적 영향은 발티체 (펠츠베르크)를 둘러싼 오스트리아와의 분쟁 문제나 자올지에를 둘러싼 폴란드와의 분쟁 문제 등, 후계 국가인 현재의 체코에도 다양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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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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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cmillan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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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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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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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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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간행물
Contested Landscape: Moravian Wallachia and Moravian Slovakia. An Imagology Study on the Ottoman Border Narrative
https://www.jstor.or[...]
Open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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